이리 저리 어떻게 하여 영화판에 발을 담근지 어언 약 3년되간다. 아는 것은 좆도 없지만, 차근 차근 영화 공부를 할수 밖에 없는 것은 당연지사다. 그러면서도 언제나 부족함을 느끼고 공부를 더해야겠다는 생각이 들면서, 영화 관련 글을 쓰는 일들이 줄었다. 왜냐면 쓰면 쓸수록 쪽팔리기 때문이다. 그만큼 영화에 관련해 글을 쓴다는 것은 어려운 일 같다.
요즘 내가 아는 사람이 영화 잡지를 만든다. 잡지 이름은 "COREA" 다. 내가 하는 청년회의 몇몇인들이 참가한 단체, 21코리아 란 연구소의 작품인데... 첨엔 반신반의 했다. 정치평론과 논문을 쓰던 곳인데 영화에 관련 잡지를 잘 만들수 있을까 했다.
주위 몇몇친구들이 나에게 권유를 해서, 그래서 흘깃 본 창간호 그림을 봤는데, 그만 창간 제목은 더욱 그 잡지에 정이 안가게 만들었다.
그 제목은 대충 "KINO 수고했다 그 다음은 우리가 맡는다" 였다.
켁...진정한 진보적 영화 평론지의 길을 걷는단다.
나는 KINO가 좋은 잡지고 좋은 평론을 담았다는 건 알지만, KINO가 망한것은 솔직히 장사가 안되기 때문이고, 뒤로 들리는 소문인 내부분열로 인한 것으로 알고 있다. (한때는 키노를 쭉 사서 모은적이있다. 아직도 서랍 저 깊은 곳에 있고 가끔씩 꺼내보곤 한다. 마지막 호도 샀지만, 물에 젖어 보관가치가 없어졌다. 다시 구해봐야지)
KINO는 재미있게도 수많은 암호문들로 독자들에게 해독 공부를 시키는 일도 했지만, 대중으로부터 자신을 그만큼 멀어지게 되는 역활도 했지 않나 싶다.
폐간을 아쉬워했지만, 당시대에 KINO는 KINO 나름대로의 역활을 충분히 했다고 본다. 그런 진지한 평론(진보적인 평론(?!)을 포함해서)의 흐름들은 현존하고 있는 영화잡지들만 해도 충분하다고 본다.
그런 상황에서 KINO가 없어져 진보적 영화평론쪽이 부족해, 내가 그것을 대신 하겠다는 것은 일종의 오만이 아닐까 한다.
진정 KINO의 팬들한테 위의 제목은 돌팔매질당하기 쉬운 제목이다.
또 과연 "COREA가 과연 KINO를 대신할수 있는가?"에 대한 가능성에 대해서도 부정적이다. KINO는 KINO가 될만큼 영화전문기자들이 존재했다. 그만큼이나 KINO의 정성일, 이연호 같은 편집장들의 입담은 걍 만들어진것이 아니다. 영화평론 전문기자들이 득실대고 그만한 글들이 나오는 건 당연한 이치인데...
과연 21corea연구소가 그만한 능력이 있을까에는 별로 신뢰가 가지 않는다.(거기에 내가 알고 믿는 사람이 있다 할지라도) 차라리 원래 하던 정치평론쪽의 글을 보고 싶은 마음이다.
암튼 서두가 길어졌는데, 그쪽에서 두번째 웹진을 내면서 희안한 제목의 글이 나왔다. 함보시라.
선언! <화씨9/11>은 기록영화가 아니다
_천국과 지옥의 영화평 2
http://www.21corea.org/data/dnbcnt.asp?dn=1&num=193&gop=1&aff=0
먼저 별로 극과 극같이 않은 영화평을(그 전 글은 <화씨911>이 반부시영화다. 뭐 이런 관점이다.) 대조함을 천국과 지욱의 영화평이라 했지만, 읽어보면 별로 대조점이 없다. 영화에 대한 찬/반의 내용도 아니고...
"선언! <화씨9/11>은 기록영화가 아니다 " 이글의 문제점은 다큐멘터리에 대한 아주 기초적인 이해가 없다는 것이다.
기록영화 같은 예술영화(극영화)는 있을 수 있어도 예술영화 같은 기록영화는 있을 수 없다. 기록영화는 실재와 사실의 범주에서만 존재할 뿐 허구가 개입되는 순간 연출의 산물, 즉 예술영화의 속성을 지니기 때문이다. 사실과 허구가 화해할 수 없는 것처럼 기록영화와 예술영화는 그 경계선이 분명하다. 그런데 ‘기록영화 감독’ 마이클 무어는 너무나 자유롭게 이 경계선을 넘나들고 있다. 그는 유능한 개척자인가, 영악한 이단아인가.
...기록영화에 대한 관객들의 믿음은 곧 감독에 대한 믿음이다. 즉, 감독이 직접 목격하거나 촬영한 것으로서 그 어떤 허구도 개입되지 않았을 것이라는 믿음이다.(붉은 글씨 COREA 인용)
켁...다큐의 반대가 극영화 일수는 있겠으나, 예술영화라는 얘기는 금시초문이다. 예술영화는 반할리우드영화 반상업적인 영화를 일컸는 말이었지, 극영화와 같은 의미로 쓰이진 않는다.
이런 기초적인 것들은 뒤로 하고 먼저 이글의 핵심적인 문제는 '<화씨 911>에는 허구가 들어갔고, 연출자의 참여, 재현 등의 극영화적인 요소들이 있고 그래서 다큐가 아니다' 라는 말을 한다. 몬가 착각을 하는가 본데...
보통 사람들이 다큐의 개념을 잘못 이해해서, 다큐를 '사실(fact)의 엄정하고 객관적인 기록'을 얘기하는데 그것은 크나큰 오해다.
왜냐면 카메라에 피사체를 담는 그 순간부터 사실(fact)은 왜곡되고 변질되기 때문이다. 물론 다큐에서는 사실성을 전제로 하지만, 피사체에 카메라를 들이 대는 것 만으로도(혹은 연출자가 다큐의 주제를 정하는 것만으로도) 생기는 그 왜곡의 성질 또한 인정해야 한다.
허구의 개입으로 인한 사실의 왜곡뿐만 아니라, 촬영 편집 혹은, 되려 다큐의 기획단계에서 오는 왜곡 또한 크다는 것이다.

의지의 승리(출처 : 딴지일보)
레니 리펜슈탈의 33년도작 <의지의 승리>나 <올림피아>를 보라. 그것이 다큐이면서도 영화안에 들어가 있는 편집과 촬영은 보는 이로 하여금 나찌에 대한 잘못된 인식을 할 수 밖에 없다.(보고 싶지만 볼수 있는 통로가 나에겐 아직없다. 본 이들의 말로는 진짜 가슴이 뛸정도로 잘 만들어 졌단다.)
다큐는 사실(fact)에 기초해 각각의 영상작업을 통해 (보통 연출자의 입장에서) 진실(truth)를 지향하는 하는 영화다. 그러기에 단순 fact의 기록과 편집이 중심이 아니라 사실(fact)에 기초한 진실(truth)이 중요하기에 다큐에는 여러가지 형식들이 용인된다. 연출자의 인터뷰(이것은 참 fact를 왜곡시키는 좋은 수단이다), 행위자로써의 참가, 상황재현, 문헌선택, 나레이션(이건 더더욱이다) 등등..
기록영화가 현실의 단순한 복사가 아닌 창조적 처리임이 분명한 것은 허구의 ‘개입’이 아니라 사실의 ‘편집’에 그 본질이 있다.
그러기에 바로 윗글처럼 다큐를 다루는 방법을 '편집'으로만 한정하는 것은 크나큰 실수이다. 게다가 <화씨 911> 처럼 목적의식이 분명한 프로파간다 영화라면, 더욱더 다큐의 형식보다는 주장하고자 하는 내용에 방점을 찍을수 있다.
마이클 무어의 <화씨 911>뿐만 아니라 그의 다른 영화 <로저와 나>,<빅원>등등 대부분의 영화들이 이런 감독 자신의 개입이 많으며, 기록자뿐만 아니라 자신의 영화에 참여하는 행동가로써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는 보통의 다큐라는 형식에 구애받는 것 보단 자신이 말하고자 하는 것을 야유, 빈정, 냉소 등을 잘 표현할수 있는 좋은 방법인 단지 다큐라는 형식을 빌리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기에 마이큼 무어는 자신의 영화를 만드는 방식에서의 민망한 오바를 첨가하고, 되려 유치하고 세련되지 못한 방식을 사용하지만(다큐의 진정성을 훼손하는듯 하지만), 그게 그의 영화가 COREA 편집위원 박선정씨가 말하듯, 다큐의 본질(?! 이부분도 인정을 못하겠지만, 그쪽의 표현을 빌리자면)에 충실하지 못해서 다큐가 아니라고 말하는 것은 옳지 않는다.
그러나 <화씨9/11>에서 보여준 그의 개입은 한계를 넘어선 듯 보인다. 애국법을 읽지도 않고 통과시켰다는 의원들에게 경종을 울리기 위해 자신이 직접 차량 마이크를 잡고 애국법을 읽어준다. 이 장면은 마이클 무어가 주연으로 출연한 말 그대로 예술영화다. 애국법의 부당성과 의원들의 한심한 작태를 보여주고자 했다면 그것을 상징하는 대상을 찾아내 렌즈를 복종시키는 것이 기록영화 감독의 역할이다. 그는 너무나 쉽고도 틀린 길을 선택했다.
되려 그반대로 활동가로써 다큐 작가의 멋진 모습들을 보여준다.
윗글처럼 너무나 쉽고 틀린 길 혹은 기본을 무시한 일탈행위라 보일것 같지만, 마이클 무어같은 다큐의 방식은 연출자의 참여함으로써 그리고 '활동가'로써 관객에게 단시간안에 사실을 인지시키고, 그들을 그 사실안에 참여시킨다. 이같은 방법이 활동가로써의 다큐멘타리 영상을 만드는 좋은 방법이라는 입증이나 하듯, 그는 여느 다큐작가보다 인기있고, 광범위한 대중앞에 화자되고 있는 것이다.
되려 이글을 쓴 "박선정"씨에게 다음의 글귀를 말해주고 싶다.
<화씨 9/11>을 그저 대중적 다큐멘터리의 미학적 특징 혹은 마이클 무어라는 진보적 스타의 프로파간다라는 관점으로 치부하며 발언한다면, 그것은 이 작품을 이미 왜곡했거나 절반도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 그러니까 이건 아주 조심스러운 발언이다. 마이클 무어는 미국 진보적 미디어 액티비즘의 역사와 성취에 있어서 한 발 전진이 아니라 경계를 깨부수고 새로운 진지전으로 돌입한 장본인이다. 그것은 분명한 성취다.
...중략...
결국 이 대중적 동의의 전략 속에서 <화씨 9/11>이 가진 가장 커다란 딜레마가 드러난다. 미국 시민, 정확히 다가올 대선에서 선거권을 가진 시민들을 겨냥한 이 작품에서 그는 ‘미국적’ 관점을 견지한다. 그의 불만은 미국 시민으로서 ‘미국 헌법에서 보장하는 자유와 권리’를 위협받는다는 것에서 비롯된다. 테러리스트들이 감행하는 제국에 대한 공격은 단순화되어 미국 시민의 생명을 위협하는 악의 축이 되는 것이며, <화씨 9/11>이라는 진보의 프로파간다 속에서 미국 자본주의 혹은 제국주의에 대한 구조적이거나 계급적 관점의 비판은 배제되어 간다. 종종 제3세계에 대한 시선은 희화화(미국 동맹국들에 대한 묘사) 혹은 감정적 동정주의(전장에서 울부짖는 어머니와 아이들)로 전락할 위험 또한 있는 것이다.
- film 2.0 통쾌한,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편한 : 정지연(영화평론가
http://www.film2.co.kr/feature/feature_final.asp?mkey=2395
되려 <화씨 911>은 바로 정지연씨가 논한 부분의 위험성이 더 크지 않을까 한다. 제3세계의 권력자로써의 동정적 시선, 개인에 대한 희회화등은 양날의 검처럼 실과 득이 되는 양면적 위험성을 내포한다. 또한 전쟁을 인정했던 미국인들한테 당 영화 한번 봐줌으로써의 그들 자신에게 면죄부가 영화가 될 소지도 크다. 그러나 그것은 마이클 무어 영화 자체의 문제지. 요즘 어떤 다큐들의 경향성의 문제는 아니다.
편집위원 "박선정"씨가 이글을 보게될 경우는 극히 드믈겠지만(뭐 내가 쓴글이 건너 건너 갈수 있는 확율도 크니깐...그리고 나도 뭐 잘란거 없지만) 보신다면, 좀더 영화관련 공부를 좀 더 하시는게 어떨지 말씀드리고 싶다. 책도 많은데 읽기 좀 그러시다면, 다큐멘타리에 대해 쉽고 재밌게 쓴글도 소개 해드리겠다.
딴지영진공의 헤비죠님의 글인데 이분이 다큐쪽에 해박하셔서...다큐멘타리에 대해 쓰신 글이 있다.
[별걸다] 다큐멘터리를 알려주마!
http://www.ddanzi.com/ddanziilbo/116/116cl_054.asp
잡지 COREA가 좀 진정 영화평론지로써 자리를 잡으려면 오래걸릴 것 같은 느낌이든다. 게다가 대중적인 잡지로 거듭날려면 진짜 피나는 노력이 필요할 것 같고, 시장에서의 기능을 하려면 (21corea연구소에 죄송한 말이지만) 잡지가 살아날 확율은 거의 희박하다고 본다. 젠장 이글을 보면 죽일려 들겠군...쩝...
비암꼬리 :
그전에 이 잡지를 만드는 친구(내가 아는)와 이런 글의 비슷한 논쟁을 한 경험이 있다. 노동자 뉴스제작단의 <노동자냐? 아니다?>라는 작품을 가지고 나는 굉장히 잘 만든 다큐라고 했고, 그 친구는 그렇게는 아니라고 했다. 윗글과 비슷한 얘기를 하는데, 다큐의 진정성이 떨어진데나...영화 처음부분, 다른 필름의 인용부분때문이라고 했고, 감독조차도 인정하는 부분이란다.
허나 나는 연출자가 충분히 건설운수노동조합의 모습을 생생히 기록했고, 단순 기록을 넘어 노동시장 유연화의 경향성과 노조의 생성과 몰락 그리고 다시 노동조합의 희망이라는 주제를 잘 담았던 것에 큰 점수를 주었다.(기회가 되면 소장하고 싶은 작품이었다.)
암튼 돌아보면 윗글과 비슷한 요지였던걸루 기억하고 있다. 그때 잘 설명해줄껄 집에 가는 길이라 가벼웠던것 같다. 힝~~
어떻게 그 친구와 이런 문제를 풀어갈지 고민이다.
Posted by 엽기민원